“안전하다더니 작은 현지 회사에 대출”…하나은행, 펀드 소송 1심서 졌다

📅 2026년 9월 26일 | 아시아경제

“타인의 손실로 더 부유해지는 것은 본성상 공평하지 않다.”

— 폼포니우스, 『학설휘찬』 제12권 제6장 제14절

💡 핵심 요약

영국 부가가치세(VAT) 대출채권 펀드에 투자한 10명이 하나은행을 상대로 낸 부당이득금 반환 소송에서 1심 원고 승소 판결이 나왔다. 주목할 점은 법원이 사기는 인정하지 않고 착오만 인정했다는 것이다. 민법은 두 길을 따로 두었고 문턱이 다르다. 사기 취소는 기망의 고의를 입증해야 하지만, 착오 취소는 중요부분에 착오가 있었고 표의자에게 중대한 과실이 없었음이면 된다. 판결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하나 더 있다. 재판부가 영국 차주 회사를 “외부감사 대상이 아닐 만큼 작은 회사”라고 표현했다. 감사를 받는지 여부가 법정에서 판단의 근거로 쓰인 것이다. 하나은행은 항소했고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 1심: 서울중앙지법 민사29부가 2025년 12월 4일 원고 승소 판결 / 하나은행이 원고들에게 1인당 2931만~1억8991만원, 총 9억54만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시
  • 항소심: 서울고법 민사18-2부가 심리 중이며 다음 변론은 10월 23일 / 판결은 확정되지 않았다
  • 투자 경위: 원고들은 2018년 5월~2019년 8월 하나은행 PB 등을 통해 사모펀드 4개에 총 38억원 투자 / 국내 자산운용사 두 곳이 설정·운용하고 하나은행이 모두 570억원어치 판매
  • 펀드 구조: 영국에서 상업용 부동산을 사는 사람에게 VAT 납부 자금을 빌려주고, 이들이 영국 국세청(HMRC)에서 VAT를 환급받으면 원리금을 회수하는 구조
  • 사고 경과: 2020년 6월께부터 환매 연기 / 판결문에 따르면 한 펀드의 차주는 투자금을 VAT 대출과 무관한 관계회사 주식 취득과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 등에 담보 없이 대여했고, 다른 펀드의 차주는 후순위 담보권만 설정 / 2021년 5월 하나은행이 투자원금 50% 가지급 / 원고들은 38억원 중 약 29억원을 이미 회수한 뒤 2023년 11월 계약 취소 내용증명을 보내고 나머지를 부당이득으로 청구
  • 법원 판단: 사기 취소는 불인정(계약 체결 당시 기망의 고의를 인정하기 부족) / 앞서 검찰도 혐의없음 처분(투자금을 가로채려는 의도를 보기 어렵다는 이유) / 다만 허위 정보 제공은 인정 — VAT 대출채권 사업의 파이프라인이 확보돼 있고 실효성 있는 안전장치가 있는 것처럼 알렸다고 봄 / 영국 차주 회사는 2017년 1월 설립 후 1년간 플랫폼 개발·테스트 정도의 규모였고 외부감사 대상이 아닐 만큼 작은 회사라고 판단
  • 배척된 항변: 하나은행은 원고들이 투자 경험과 지식을 갖췄고 위험을 충분히 설명받았으며, 문제는 운용사의 사후적 부실 운용이고 착오가 있었더라도 투자자의 중대한 과실 때문이라고 주장 / 또 투자금이 곧바로 펀드 재산으로 넘어가 운용사 지시대로 쓰였으므로 은행에 남은 이익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이 글은 공개된 1심 판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하나은행이 항소해 항소심이 진행 중이며, 1심 판단은 확정된 것이 아니다.

📖 알아두면 좋은 용어

  • 착오 취소 : 계약 내용의 중요한 부분을 잘못 알고 의사표시를 한 경우 그 계약을 취소하는 것. 상대방의 고의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사기 취소와 다르다.
  • 부당이득 : 법률상 원인 없이 얻은 이익. 계약이 취소되면 처음부터 무효가 되므로 그에 따라 받은 돈은 법률상 원인을 잃고 반환 대상이 된다.
  • 현존이익 : 받은 이익 중 반환 시점에 남아 있는 부분. 선의의 수익자는 이 범위에서만 돌려주면 되므로, 이익이 남지 않았다는 주장은 반환액을 줄이려는 항변이 된다.

📚 관련 기준 본문

※ 아래 인용 상자는 법조문 원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이해를 돕기 위해 요건을 풀어 정리한 요약이다.

1. 민법 제110조·제109조 — 사기와 착오는 문턱이 다르다

고의를 증명해야 하는 길과 그렇지 않은 길

사기나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취소할 수 있다(제110조 제1항). 한편 의사표시는 법률행위의 내용의 중요부분에 착오가 있는 때에는 취소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착오가 표의자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때에는 취소하지 못한다(제109조 제1항). 두 경우 모두 취소는 선의의 제삼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제110조 제3항, 제109조 제2항).

👉 사건 연결: 이 판결의 구조가 두 조문의 차이를 그대로 보여 준다. 재판부는 제110조의 사기를 인정하지 않았다. 계약 체결 당시 기망의 고의가 있었다고 보기에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다. 검찰이 앞서 혐의없음 처분을 한 것도 같은 방향이다. 그런데 제109조의 문언에는 상대방의 고의가 등장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⑴ 중요부분의 착오와 ⑵ 표의자에게 중대한 과실이 없었다는 점뿐이다. 그래서 “속일 마음은 없었지만 사실과 다른 정보를 주었다”는 중간 지대가 제109조로 포섭된다. 하나은행이 투자자들의 중대한 과실을 주장한 것은 제109조 제1항 단서를 겨냥한 것이었고,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 민법 제109조 제1항 — ‘중요부분’의 판단 방식

알았더라면 투자하지 않았을 것인가

의사표시는 법률행위의 내용의 중요부분에 착오가 있는 때에는 취소할 수 있다(제109조 제1항 본문).

👉 사건 연결: 조문은 ‘중요부분’이라고만 적어 두었고, 그 판단은 재판부의 몫이다. 이 판결이 쓴 기준은 가정적 의사였다. 재판부는 “원고들이 그러한 사실을 알았더라면 이 사건 각 펀드에 투자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고려하면 원고들의 착오는 계약의 중요한 부분에 관한 것”이라고 판시했다. 착오의 대상이 된 정보도 구체적이다. 사업 파이프라인이 확보돼 있다는 설명과 실효성 있는 안전장치가 있다는 설명이다. 뒤에 드러난 사실은 차주가 담보 없이 관계회사에 돈을 빌려주거나 후순위 담보권만 잡았다는 것이었다. 즉 착오의 핵심은 수익률 전망이 아니라 구조의 존재 여부에 있었다. 투자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것과 있다고 들은 장치가 실제로 없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판단이다.

3. 민법 제741조 — 취소가 되면 원인이 사라진다

손해배상이 아니라 부당이득으로 간 이유

법률상 원인없이 타인의 재산 또는 노무로 인하여 이익을 얻고 이로 인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이익을 반환하여야 한다(제741조).

👉 사건 연결: 원고들이 택한 청구원인이 손해배상이 아니라 부당이득 반환이었다는 점이 이 사건의 실무적 핵심이다. 설명의무 위반에 따른 손해배상은 위반 사실과 손해액을 따로 증명해야 하고, 투자자의 과실이 있으면 과실상계로 배상액이 깎인다. 반면 계약이 취소되면 그 계약은 처음부터 없던 것이 되고, 그에 따라 건네진 돈은 법률상 원인을 잃는다. 그러면 남은 문제는 얼마를 반환할지이지 얼마의 손해가 발생했는지가 아니다. 원고들이 2023년 11월 계약을 취소한다는 내용증명을 먼저 보낸 것은 이 경로를 여는 절차였다. 같은 사고를 두고도 어떤 법적 문을 두드리는지에 따라 다툴 쟁점이 달라진다.

4. 민법 제748조 — “남은 이익이 없다”는 항변의 근거

선의의 수익자와 현존이익

선의의 수익자는 그 받은 이익이 현존한 한도에서 반환 책임이 있다(제748조 제1항). 악의의 수익자는 그 받은 이익에 이자를 붙여 반환하고 손해가 있으면 이를 배상하여야 한다(제748조 제2항).

👉 사건 연결: 하나은행이 “투자자들에게서 받은 돈이 곧바로 펀드 재산으로 넘어가 운용사 지시대로 쓰였으므로 은행에 남아 있는 이익이 없다”고 주장한 것은 제1항의 현존이익 항변이다. 받은 것이 이미 남아 있지 않다면 돌려줄 것도 없다는 논리다. 재판부는 이를 배척했는데 그 근거가 합의의 범위였다. 투자금을 ‘VAT 대출채권 사업에 투자하는 펀드’에 쓰기로 한 합의가 있었는데 실제로는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 등에 들어갔으므로, 그 지출을 원고들의 지시나 합의에 따른 사용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돈이 나갔다는 사실만으로 현존이익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한 용도대로 나갔는지를 따진 셈이다.

5. 외부감사법 제4조 — 감사 대상 여부가 판단 근거가 되다

“외부감사 대상이 아닐 만큼 작은 회사”

다음 중 하나에 해당하는 회사는 재무제표를 작성하여 회사로부터 독립된 외부의 감사인에 의한 회계감사를 받아야 한다. ⑴ 주권상장법인, ⑵ 해당 사업연도 또는 다음 사업연도 중에 주권상장법인이 되려는 회사, ⑶ 그 밖에 직전 사업연도 말의 자산, 부채, 종업원수 또는 매출액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준에 해당하는 회사(제4조 제1항).

👉 사건 연결: 재판부가 영국 차주 회사를 두고 “외부감사 대상이 아닐 만큼 작은 회사”라고 표현한 대목은 회계 쪽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영국 회사여서 우리 외부감사법이 직접 적용되지는 않지만, 재판부는 감사를 받는지 여부를 회사의 규모와 신뢰성을 가늠하는 척도로 삼았다. 외부감사법 제4조가 정한 기준은 상장 여부와 자산·부채·종업원수·매출액이다. 이 기준에 미달하는 회사는 제3자가 검증한 재무제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2017년 1월에 설립돼 1년간 플랫폼을 개발하고 테스트하던 회사에 수백억원 규모의 자금을 빌려주는 구조였다면, 판매 단계에서 무엇을 근거로 상환 능력을 설명했는가가 남는 질문이 된다. 해외 비상장 차주가 끼는 구조에서는 감사보고서의 존재 자체가 실사의 출발점이다.

🔍 시사점

  1. 사기가 아니어도 계약은 무를 수 있다 : 제110조는 기망의 고의를 요구하지만 제109조는 요구하지 않는다. 검찰이 혐의없음 처분을 하고 법원이 사기를 인정하지 않았는데도 계약 취소가 인정된 것은 모순이 아니다. 형사와 민사, 사기와 착오는 각각 다른 문턱을 갖는다.
  2. 다툰 것은 수익률이 아니라 구조였다 : 재판부가 착오의 대상으로 본 것은 사업 파이프라인과 안전장치의 존재였다. 위험을 감수한 것과, 있다고 들은 장치가 없던 것은 다르다. 판매 자료에 구조를 단정적으로 적는 일이 어떤 결과를 부르는지 보여 준다.
  3. 구제 수단의 선택이 쟁점을 바꾼다 : 손해배상으로 가면 손해액과 과실상계를 다투고, 계약 취소와 부당이득으로 가면 취소 요건과 반환 범위를 다툰다. 원고들이 내용증명으로 취소 의사를 먼저 밝힌 것은 후자의 문을 여는 절차였다.
  4. “돈이 나갔다”가 곧 “이익이 없다”는 아니다 : 제748조 제1항의 현존이익 항변은 유력한 방어 수단이지만, 재판부는 약속한 용도를 벗어난 지출은 합의에 따른 사용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자금의 이동 사실보다 이동의 근거가 쟁점이 된다.
  5. 감사받지 않는 회사는 검증된 숫자가 없는 회사다 : 재판부가 “외부감사 대상이 아닐 만큼”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규모를 말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제3자의 검증이 없는 재무정보를 가리킨다. 해외 비상장 차주가 들어오는 구조에서 감사보고서의 유무는 실사의 첫 항목이다.
  6. 투자 시점의 법을 봐야 한다 : 이 투자는 2018~2019년에 이뤄졌다. 당시 설명의무를 규정했던 자본시장법 제47조는 2020년 3월 24일 삭제되어 금융소비자보호법으로 옮겨 갔다. 지금 법전에서 그 조문을 찾으면 “삭제”만 나온다. 과거 판매 건을 따질 때는 그때 적용되던 조문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다.